지난 6·3 지방선거 본투표 당일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투표용지 대란’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무리한 지침 개정과 총체적인 관리 부실이 겹쳐진 ‘인재(人災)’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선관위는 사태 직후 부족 수량을 축소 파악했다가 뒤늦게 정정하는 등 미숙한 대처로 일관해 국정조사와 특검을 요구하는 정치권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 회의록도 없이 깎아버린 투표지, 탁상행정이 부른 참사
10일 국회 정희용·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실이 중앙선관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선관위는 지난해 12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종합관리지침'과 '공직선거 절차사무편람'을 개정하면서 투표용지 인쇄 매수 하한 기준을 기존 예상 선거인 수의 60%에서 50%로 대폭 낮췄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위원들이 모여 심도 있게 논의하는 공식 회의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관위 측은 “각 부서 의견을 취합한 뒤 내부 결재를 거쳐 하달했다”며 “별도 회의를 개최하지 않아 회의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인했다.
이 같은 기계적 기준 적용은 고스란히 현장의 참사로 이어졌다. 과거 지방선거에서 본투표율이 50%를 줄곧 넘겼던 서울 송파구 등 격전지에도 하한선인 50% 기준이 무차별 적용되면서 투표 당일 곳곳에서 투표용지가 바닥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 닷새 만에 1.5배 늘어난 규모, 최대 105분간 투표 중단
부실한 행정은 사후 집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선관위는 선거 직후인 지난 5일 기준으로 전국 50개 투표소에서 4,726장이 부족했다고 발표했으나, 닷새 만에 국회에 제출한 최종 자료에서는 '전국 91개 투표소, 7,194장 부족'으로 규모가 1.5배 가까이 늘어났다. 초기 파악조차 엉망이었던 셈이다.
지역별로는 서울의 부족 규모가 4,206장으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가장 많이 부족했던 곳은 서울 송파구 잠실4동 제7투표소(436장)였으며, 강남구 청담동 제4투표소(383장), 인천 남동구 간석1동 제4투표소(306장)가 그 뒤를 이었다.
용지 부족으로 인해 전국 26개 투표소에서는 실제 투표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단 시간은 최소 4분에서 최대 105분에 달했다. 서울 송파구 잠실2동 제2투표소의 경우 무려 1시간 45분 동안 선거가 완전히 멈춰 서 유권자들이 극심한 불편을 겪었다. 심지어 선관위는 송파구 문정2동 제2투표소 등 3곳의 정확한 투표 중단 시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옆 투표소 가서 빌려와라”, 일선 공무원에 위법 이송 지시까지
투표 현장의 임기응변식 대처도 법적 도마 위에 올랐다. 부산 북구 화명1동 제7투표소에서는 본투표 마감 직전인 오후 5시 50분쯤 용지가 덜어지자, 북구선관위가 현장 지원을 나온 구청 소속 일반 공무원에게 “옆에 있는 제6투표소로 가서 투표용지를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해당 공무원은 선관위 직원 동행 없이 홀로 500m 떨어진 인근 초등학교를 찾아 투표용지 50매를 직접 이송해왔다. 공직선거법 제151조에 따르면 투표용지의 이송과 관리는 구·시·군 선관위의 책임 책임하에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법적 권한과 책임이 없는 일반 공무원을 투표지 배달에 동원한 것을 두고 위법 논란과 함께 행정편의주의라는 지적이 쏟아지는 이유다.
공무원노동조합 부산본부 측은 “일선 행정 공무원들은 선거법을 전문적으로 알지 못하는데, 긴박한 상황을 핑계로 위법성 있는 지시를 내렸다”며 “투표 동원에 이어 법적 처벌까지 공무원에게 떠넘기려 하느냐”고 강력히 반발했다.
◇ 정치권 “총체적 관리 부실, 국정조사와 특검 추진해야”
예산 관리 부실 정황도 추가로 드러났다. 선관위는 국가 선거와 달리 지방선거는 지자체 예산으로 집행된다는 이유로 투표용지 인쇄비 편성·집행 내역을 즉시 파악하지 못했다.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예산의 경우에도 실제 선거인 수가 아닌 시·도별로 500만 원씩 일괄 배정하는가 하면, 인쇄비를 별도 항목이 아닌 13억 원 규모의 일반 운영비에 포함해 사후 모니터링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국민의힘 정희용·송언석 의원은 “이번 사태는 선관위의 무능과 무책임, 잘못된 정책 결정이 빚은 예고된 인재이자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한 중대 사안”이라고 규정하며, “국정조사와 특검을 통해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사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중앙선관위는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으로 대기하셨던 유권자들께 깊이 사과드린다”며 “신속한 대응을 위해 인근 투표소의 용지를 활용했으나, 향후 투표용지 수량 산정 방식과 이송 절차 등 선거 관리 프로세스 전반을 재점검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