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은 국가를 지탱하는 혈관이다. 그러나 그 혈관이 오히려 국민의 숨통을 죄는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세금을 걷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지난 8월 25일, 포항에서 배터리 업체를 운영하던 62세 사업가 서모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마지막 몇 해는 세금과의 싸움이었다. 과거 대주주로 있던 부동산개발업체가 사업 좌초 끝에 부지를 매각하자, 포항세무서는 매각 금액만 보고 77억 원대의 차익이 났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날아든 법인세 고지서가 29억7,000만 원이었다. 이의신청으로 10억9,000만 원까지 줄었지만, 회사가 이를 내지 못하자 세무서는 서씨 개인을 제2차 납세의무자로 지정하고 압류에 들어갔다.
그 뒤의 일은 중소기업인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대출 연장은 거부되고, 사업 자금은 묶였다. 직원 월급을 주려고 살던 집까지 담보로 잡혔다.
그런데 올해 1월, 조세심판원은 서씨의 손을 들어줬다. 사업은 상인 반발이라는 정당한 사유로 무산됐고, 매각 대금은 빚을 갚는 데 모두 들어가 실질적인 이익이 없었다는 것이다. 세금 부과도, 제2차 납세의무자 지정도 '전액 취소'였다. 국가가 틀렸다는 판정이었다.
문제는 그 판정이 아무것도 되돌려주지 못했다는 데 있다. 무너진 신용과 끊긴 거래, 소송에 들인 비용과 시간은 누구도 배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승소 이후에도 별도의 세무조사가 이어졌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세금은 부과해 놓고 아니면 네가 소명하라는 식이라는, 전문 지식도 없고 비용도 많이 든다는, 하루하루가 힘들다는 호소가 적혀 있었다.
이 사건은 지난 16일 국정감사장에서 다시 불려 나왔다. 이종욱 의원은 "국민이 맡긴 세무조사권으로 국민을 극단적 상황까지 몰고 가서는 안 된다"고 했고, 임이자 의원은 "일단 세금을 매기고 불복하면 취소해 주는 행정이 반복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국세청이 개인정보를 이유로 자료 제출을 거부하자 "살아 있을 때는 왜 보호하지 못했느냐"는 질책도 나왔다.
이것을 한 세무서의 실수로만 볼 수 있을까. 숫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대구·경북에서 납세자가 불복해 돌려받은 세금은 2022년 192억 원에서 2024년 982억 원으로 2년 만에 다섯 배가 넘게 불었다.
올해 상반기 조세심판 인용 실적은 대구청과 부산청이 전국 1, 2위다. 잘못 매긴 세금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982억 원의 뒤편에는, 돌려받기까지 버티지 못한 사람들과 애초에 다툴 엄두조차 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대기업에는 세무 전문가 군단이 있다. 영세사업자와 개인에게는 없다. "억울하면 증명하라"는 방식은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증명할 돈과 시간과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만 공정하다. 과세 단계에서 국가가 감당해야 할 입증의 부담을 납세자에게 떠넘기고, 그 사이 압류와 신용 하락이라는 실질적 형벌이 먼저 집행되는 구조. 서씨를 무너뜨린 것은 세금 그 자체가 아니라 이 구조였다.
포항에서 이런 비극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 아프다. 몇 해 전에도 포항의 한 사업자가 세무 문제로 고통받다 세무서 건물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박정열 대구지방국세청장은 국감장에서 유가족에게 위로를 전하며 "납세자 사정을 더 세심히 살피겠다"고 했다. 진심이었으리라 믿는다. 다만 다짐만으로는 다음 비극을 막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제도다.
첫째, 과세 전 검증을 실질화해야 한다. 납세자보호담당관이 고액 과세나 쟁점이 큰 사안을 사전에 들여다보고 제동을 걸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둘째, 불복이 진행 중인 사안에서 압류나 제2차 납세의무자 지정 같은 강제 징수는 훨씬 신중해야 한다. 판정이 나기도 전에 사람과 기업이 먼저 쓰러진다면 승소는 의미가 없다.
셋째, 명백히 잘못된 과세로 납세자가 입은 손해는 국가가 책임지는 장치가 있어야 하고, 반복적으로 무리한 과세를 한 조사 담당자에게는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넷째, 영세 납세자를 위한 국선대리인 제도를 이름뿐이 아닌 실제로 기댈 수 있는 수준으로 넓혀야 한다.
세무조사권은 국민이 국가에 맡긴 칼이다. 그 칼은 탈세를 베라고 준 것이지, 힘없는 납세자를 겨누라고 준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안타깝다"는 말로 끝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