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시월의 끝자락, 어디론가 훌쩍 떠나 단풍에 흠뻑 젖고 싶은 계절이다. 붉게 물든 산자락을 바라보며 잠시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낙엽이 들려주는 가을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은 이들에게 숨겨진 비경 한 곳을 소개하고 싶다. 경북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한 자작나무숲이다.
이곳에는 여느 단풍 명소와는 다른 특별한 가을이 기다리고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순백의 자작나무 사이로 황금빛 잎들이 바람에 일렁이고, 붉은 단풍이 수줍게 내려앉는다. 은빛 나무줄기와 붉고 노란 단풍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자연이 오랜 세월 공들여 그려낸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숲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의 소란스러움은 어느새 멀어진다. 바람이 스치면 자작나무 잎들이 사각거리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발밑에 쌓인 낙엽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가을의 노래를 들려준다. 햇살은 흰 나무줄기 사이로 부서져 내리고,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황금빛 잎들은 마치 숲 전체에 작은 별들이 내려앉은 듯하다.
가을은 어디에나 찾아오지만, 영양 자작나무숲의 가을은 조금 특별하다. 흰빛과 노란빛, 붉은빛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화려하면서도 요란하지 않고, 깊고 고요하면서도 쓸쓸하지 않다.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 오래전 잊고 지냈던 마음속 풍경 하나를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아름다운 숲에도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다. 1993년 산림청은 솔잎혹파리 피해로 상처 입은 죽파리 국유림을 되살리기 위해 자작나무를 심었다. 처음에는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하던 어린 묘목들이 30여 년의 세월을 견디며 하늘을 향해 자랐다. 겨울의 눈보라와 여름의 폭우, 수없이 찾아온 봄과 가을을 지나며 나무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오늘의 숲을 이루었다.
약 30.6㏊에 이르는 자작나무숲은 축구장 40여 개를 펼쳐놓은 듯한 규모다.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보다 훨씬 넓은 이곳은 오랫동안 깊은 산속에 숨겨져 있다가 2020년 산림청의 '국유림 명품숲'으로 지정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웠던 시간이 오히려 숲의 순수함을 지켜준 셈이다.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자작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가지런히 늘어선 흰 나무줄기는 마치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기둥처럼 보이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가을 햇살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조금 전까지 눈부시게 빛나던 숲은 구름 한 점이 지나가면 차분한 은빛으로 가라앉고, 다시 햇살이 비치면 황금빛 물결로 일렁인다.
숲속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을 걷는 즐거움도 남다르다. 맑은 계곡물은 낮은 목소리로 가을을 노래하고, 낙엽이 내려앉은 길 위에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손을 맞잡은 연인들은 흰 나무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오랜 세월을 함께한 부부는 말없이 나란히 걸으며 지나온 시간을 떠올린다. 아이들은 낙엽 한 장에도 웃음을 터뜨리고, 어른들은 그 웃음소리에 잠시 잊었던 어린 시절을 만난다.
이곳에서는 서둘러 걸을 이유가 없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천천히 걷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숲은 무엇을 보여주려 애쓰지도, 무엇을 말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제자리에 서서 찾아온 이들에게 잠시 쉬어가라고 손짓할 뿐이다.
특히 오후의 숲은 더욱 아름답다. 해가 서쪽 산등성이로 기울기 시작하면 비스듬히 내려오는 햇살이 자작나무의 흰 수피를 따뜻한 금빛으로 물들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잎들은 마치 수천 마리의 나비가 숲속을 날아다니는 듯하고, 나무 사이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가을의 깊이를 더한다. 사진 한 장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풍경이다.
숲길을 걷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흰 나무줄기 끝에 매달린 노란 잎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인다. 바람이 불면 몇몇 잎들이 가지를 떠나 허공을 맴돌다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는다. 나무는 떠나는 잎을 붙잡지 않고, 낙엽은 미련 없이 땅으로 돌아간다. 가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어쩌면 이렇게 떠나는 순간까지 아름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양 자작나무숲의 매력은 숲을 벗어난 뒤에도 이어진다. 반변천과 남이포가 빚어낸 절경을 품은 선바위관광지, 조선 선비의 정취가 살아 있는 서석지, 시인 조지훈의 문학적 향기가 머무는 주실마을, 옛 고택과 음식디미방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두들마을까지 영양 곳곳에는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명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낮의 영양이 은빛 자작나무와 단풍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면, 밤의 영양은 별빛으로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같은 수비면에 자리한 국제밤하늘보호공원에서는 도시의 불빛에 가려졌던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채운다. 낮에는 숲에서 바람의 노래를 듣고, 밤에는 쏟아질 듯한 별빛을 바라보는 여행. 영양이 간직한 자연의 선물이다.
가을은 언제나 짧다. 찬란하게 물들었다가 어느 날 문득 낙엽이 되어 떠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을 사랑하면서도 아쉬워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영양 자작나무숲에서 만나는 가을은 조금 다르다. 나무 사이로 스며들던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던 잎새, 발밑에서 들려오던 낙엽 소리는 숲을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계절은 지나가도 풍경은 추억이 된다. 단풍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이 가을, 잠시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영양의 은빛 숲으로 걸어 들어가 보자. 그곳에는 바쁘게 살아오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우리 마음속의 가을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세월 속에 잠시 잊고 지냈던 낭만까지도.